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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한국인 우범선은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로 명성황후를 겁탈했다?



에조 보고서 때문에 이리 저리 찾아보다가 발견한 동영상 하나.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한 조선시대 마지막 황손 이석씨의 말을 들어보면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일 상궁 옷을 입고 있는 명성황후를 보고 저 사람이 명성황후라고 지목했던 훈련대장은 한국인 우범선으로 왕비를 시간(시체를 간음하는 걸 말한다)했다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줬다. 그런데 더욱더 충격적인 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여자와 결혼한 우범선이 낳은 아들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라는 사실. 허걱~ 참 세상의 인연이 어찌 이리 얽히고 섥힐꼬. 


조선의 마지막 황손?

동영상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 황제가 있었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여튼 그렇다고 해서 이석씨가 황손이 아닌 건 아니니까. 패스. 다만 적통은 아니었다.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를 보면 적통이 되려면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의 대를 이어야 하는데, 순종이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그 다음 순위로 순헌황귀비의 장남인 영친왕이 올랐다. 의친왕은 고종의 후궁인 귀인 장씨의 아들이기에 적통이 아니라는 얘기. 게다가 마지막 황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의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에서 보면 다른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 의친왕의 13남 9녀는 표기가 안 되어 있는데 이석씨는 13남 9녀 중에서 11남이라고 하니 이 중에 살아계신 분이 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찾아보니 4남 5녀가 생존해 있지만 다 외국에서 살고 있고 이석씨만 한국에서 살고 있단다. 고로 마지막 황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마지막 황손이라고 하면 마치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황손이라고 해석하기도 쉽고 말이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

두산백과 사전에서 우범선이란 인물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본관은 단양(丹陽) 우씨이다. 1857년 5월 충청북도 단양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무인의 맥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서를 익혔으며,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에 배치되었다. 1881년(고종 17) 별기군(別技軍)에 자원하여 참령(參領)이 되고 김옥균이 주도하는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대원군파로 몰려 평안북도로 귀양을 갔다가 평안감사 민병석에 의해 장위영(壯衛營) 영관으로 발탁되었다. 1894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의원이 되고 갑오개혁에 가담했다. 1895년 일본이 주도하여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7일 명성황후는 친일성향의 훈련대에 위협을 느끼고 해산과 무장해제를 명하였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훈련대 해산 다음날 우범선은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그는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부어 태우는 마지막 처리 과정에도 가담하였다. 우범선은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오판(誤判)하였다. 1896년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 도쿄[東京]에 거주하였다. 일본정부의 보호와 후원을 받았고,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 仲]와도 결혼하였다.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농학자(農學者) 우장춘(禹長春)이다(1898 출생). 이후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吳市]에서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거주하였다가, 일본에 정치적으로 망명해있던(그러나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고영근(高永根)·노원명에게 암살당하였다(1903.11).


이석씨의 말에 의하면 책에도 안 나와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면서 상궁 옷을 입고 있는 명성황후를 지목하였고(일본인들은 명성황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가 없었기에) 겁탈(시간)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이석씨도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고 들은 얘기라고 하지만 신분이 황손인지라 황가에서 전해내려오는 얘기를 전해 들었으니 신빙성 여부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거겠지만 말이라는 건 와전되기 쉽상이고 거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더 와전되기 때문에 황손이 한 얘기니까 '100% 진실이다'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르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어떻게 알고 시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얘기가 많고(실제로 명성황후는 시해되지 않았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겁탈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도 살아 있을 때 했던 강간이다 아니면 돌아가시고 나서 했던 시간이다 강간하는 도중에 돌아가셔서 강간과 시간을 모두 당했다는 얘기도 분분해서 무엇이 맞는 얘기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거는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는 우범선이 맞으며, 을미사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명성황후를 지목했고, 겁탈을 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분명 한국인으로 할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거는 분명한 거 같다.


한 가지 이해된 부분

에조 보고서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심을 갖고서 이리 저리 찾아보면서 한 가지 궁금했었던 부분이 있었다. 아니. 고작 일본인들 몇십명이 몰려왔다고(이석씨는 60명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정확한 데이터인지는 모르겠다.) 300여명의 궁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거 막지 못했겠냐는 거다. 물론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은 하지만 선뜻 이해가 안 갔었던 부분인데 이석씨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권총을 쐈다는 얘기. 음. 쫄았겠네 그랴. 일본도만 차고 온 줄 알았더니 권총까지 들고 왔다니. 쓰벌놈들.

+
이석씨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이란 노래를 불렀던 가수이기도 했다.

++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이석씨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거란다. 황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상이 정말 좋으시다. 황손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린다는. 근데 이석씨의 삶을 보면 정말 순탄한 삶이 아니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