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와 유방 2 -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달궁 |
총평
2007년 9월 30일 본 책이다. 아마도 1편은 이런 저런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해석이 많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2편은 1편과 달리 다른 역사소설과 같이 인물의 심리 묘사가 잘 그려져 있다. 그래서 1편보다는 쉬이 읽히면서 재밌게 읽힌다. 물론 당연히 항우와 유방이 그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그 두 사람의 많은 참모들에 대한 인물됨과 그들의 일화 그리고 작가의 해석이 곁들여지면서 그 재미를 더하는 듯 하다.
스타일이 상극과도 같은 두 명의 영웅들 휘하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왜 그들 밑에 있었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그들을 따랐는지 이런 부분들을 2편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항우와 유방의 인물 됨됨이를 작가는 매우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어느 한 쪽이 더 낫다라는 입장을 취하기 보다는 장단점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편에서 보였던 작가의 해석이 많다는 것을 2편에서도 느끼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책도 여느 역사 소설처럼 시간의 흐름대로 기술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작가의 해석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조금은 독특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어떤 인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이 될 때에는 그 인물에 대한 과거의 얘기부터 작가의 해석이 어느 정도 들어가 그 인물에 대해서 잘 보여준다.
물론 전반적인 스토리가 항우와 유방이라는 두 명의 시대적 영웅에 포커싱을 두고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참모들이 구성되어 있으니, 당연히 항우와 유방의 사건 시간 순대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면서 그들의 핵심 참모들이 등장하게 될 시에는 그렇게 밖에 얘기를 할 수는 없었을 듯 싶다. 여느 역사 소설도 이와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는 있지만 특히나 이 책은 작가인 시바 료타로가 많은 문헌을 접해서 그런지 그런 작가의 객관적(?)인 해석이 잘 녹아들어 있는 책이다.
항우
사람들의 지적 과정 중에서 단 한 가지 요인만을 가지고 개인을 분류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수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만큼 그릇된 것이다.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항우라는 인물의 캐릭터는 이 책을 통해서 보건대 너무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 사람을 판달할 수 있는 많은 면이 있겠지만 항우와 유방이라는 상극의 두 인물을 대조함으로 인해서 그런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 하다. 항우라는 캐릭터를 잘 나타내는 두 문단을 옮겨본다.
< 출처 : 생각의 탄생 >
오래 전부터 그렇게나 항우를 고통스럽게 했던 진나라의 장한 장군이 검을 버리고 항우 앞에 투항하자, 항우의 내면에서 그 적장에 대한 가없는 애정이 솟구쳤다. 항우는 그의 목숨을 보전해준 것은 물론이고, 장한이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극진히 대우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장한의 병사 20만을, 그들이 초군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대량학살해버렸다. 항우에게도 애정과 측은지심이 있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항우 자신이 대상에 대해 애정을 느끼지 못하면, 마치 뚜껑을 쾅 닫아버리기라도 한 듯이 한 방울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적에 대해서는 맹수와도 같지만, 그 병졸에게 말을 걸 때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인자합니다. 병졸들이란 고향을 멀리 떠나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고, 즐거움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생활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늘 인에 굶주려 있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항왕의 그 부드러움과 따스한 배려를 느낄 때 그들은 추운 들판의 짐승들이 따스한 햇살 아래 몸을 드러낸 듯이 푸근한 정에 감싸입니다. 그래서 항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나라 사람은 원래가 그런 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방
<삼국지>의 유비와 조조와 같이 항우와 유방은 매우 다른 캐릭터이다. 서로 공통점이 별로 없어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유방이라는 캐릭터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삼국지>나 <초한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을 하면서도 말이다. 이번에는 유방이라는 캐릭터를 잘 나타낸 두 문단을 옮긴다.
그렇게 불필요한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유방의 또 다른 버릇이었다. 필요하면 열성적으로 상대에게 기대며 발가락이라도 핥을 자세를 보이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금방 잊어버린다. 냉담하다든가 계산에 밝기 때문이라는 설명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성격정 특성이었다.
이윽고 두 마리 말은 피로에 절어 마차 바퀴의 움직임도 둔해지기 시작했다. 아들과 딸이 타고 있어 무겁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방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아들의 목덜미를 잡고 마차 밖으로 던져버리고, 이어서 딸의 손목을 잡고 마차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하후영은 깜짝 놀라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뛰어내려 두 아이를 태우고 다시 달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하고 유방이 나무랐다.
"내 자식을 버린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야!"
"무슨 생각이신지요?"
"마차를 가볍게 해야 하지 않느냐"
유방의 행동은 이 대륙의 전통적인 윤리감각으로 볼 때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의 의식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유교 이전의 토속적인 윤리로 보나 유교 이후의 윤리로 보나, 부모는 줄기고 자식은 잔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효사상은 어디까지나 부모 우선이다. 부모가 위험에 빠져 있는데 자식이 태연하게 마차의 무게를 늘이고 있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유방의 행위는 내릴 생각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효를 행하도록 도와준 데에 지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부모가 존재하면 자식은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인 유방을 생산할 수는 없다.
끝으로
물론 개인적인 성향상 좋아하는 스타일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배울 점을 배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지>의 유비나 <초한지>의 유방이나 <대망>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모두 일맥 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아무리 내가 선호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본받아야할 것이다. 문제는 아는 것과 체득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고 체득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되지 않겠는가?